‘장애인 거주시설에서의 삶 증언대회-그곳에 사람이 있다’ 김순애 씨

경추인데 3번, 4번 뼈가 부러지셔서 완전히 와상으로 누워계시는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셨어요. 그 일이 있고 다음 날 이 분 누워 있는데 옆에 앉아서 정말 펑펑 울었어요. 내가 아빠한테도 뽀뽀 안 하는데, 생판 모르는 이상한 아저씨가 나한테 이렇게 한다고. 내가 근육병이라서 나를 얕잡아보고 그러는 건가 하고 막 울었어요. 그 다음에 다른 목사님 사모님한테 자초지종을 다 얘기했어요. 그래가지고 그 사모님이 언생한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냐고 막 따졌어요. 그러니까 그 언장목사님이 나한테 와서 딱 하는 말이 그래요. “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아니 너한테 딸처럼 그런 건데.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면 쓰겄냐”고. 아니 그럼 즈그 딸한테도 그렇게 하느냐고요. 그 뒤로는 완전히 저를 투명인간 취급 했어요. 사람이 있는데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어요. 나는 여기서 살아야 하는데... 아니 나는 여기서 끝까지 살아야 되나..

그분(아주머니)이 저한테 여기에 쭉 살면서 힘들겠다고 하면서 그 원장목사님한테 잘못했다고 편지를 쓰라 그랬어요. 그런데 난 내가 뭘 잘못했지? 생각해서 그분이 불러 주는대로 받아썼어요. 편지 써서 키보드 옆에 놨더니 한 이틀 뒤엔가 다시 도로 돌아왔어요.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그 뒤로 뽀뽀는 안했어요. 근데 더 심하게 그랬어요. 제가 침대에 앉아있으면 근력이 없는데, 그럴 때 와서 절 딱 안아 가지고 눕혀버렸어요. 제가 막 버둥거리다 물었어요. 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어요. 힘으로 안 되니까. 그런데 저는 바로 말을 할 수 있으니까 저한테는 이런 거 빼고는 더 심하게는 못했어요. 근데 거기에는 저보다 심한 지적장애인들이나 정신장애인들이 있는데 오후에 언니들이 마땅히 할 일이 없잖아요. 언니들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으면 그 원장목사가 와서 언니들 무릎을 베고 누워요. 언니들 무릎을 베고 눕고, 막 만지고 밖에서도 안 보던 걸 내 눈 앞에서 보는데... 그런 거 때문에 나 여기서 정말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발버둥 쳤어요.

많이 기다렸죠? 그날 그 지옥 같은 곳을 탈출했어요.

저는 와상으로 누워계시는 그 아주머니 때문에 거기를 나왔어요. 그 시설에서 제가 계속 살았다면 너무 힘들어서 아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못된 생각을 했을 수도 있어요. 그 분이 서울에 발바닥행동 김정하활동가하고 친했더라고요. 그분은 핸드폰을 갖고 있었어요. 원래는 다 핸드폰을 소지 못해요. 시설이 불법적인 게 너무 많아서 누가 찍거나 전화할까봐 핸드폰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저도 갖고 싶었거든요. 말을 했더니 안 된대. 돈은 누가 낼 거냐. 근데 내 앞으로 나오는 돈이 있잖아요. 근데 그게 내가 거기서 생활하는 의식주에 다 들어간다고 돈이 없대요. 이래서 거기 있는 사람들은 이분 빼고는 핸드폰이 아예 없었어요. 이분은 시설 들어오기 전부터 핸드폰 갖고 있었는데 원장목사하고 엄청 싸워서 이겼대요. 이분이 내가 김정하선생님하고 연락 해볼 테니까 ‘네가 나갈 용기가 생기면 나한테 말을 해라.’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전 ‘언제든지 나갈 수는 있는 거네.’ 그랬죠. 제가 연락해 달라 그랬어요. 낮에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 다 원장 목사한테 말하니까 밤에만 통화했어요.

그러다 김정하 그분이 우리가 갈 때 하루 전날 전화 할테니까 준비를 하고 있으라 그랬어요. 그래서 밤마다 짐을 쌌어요. 다 싸놓고 연락이 딱 왔어요. 그런데 저희 아빠가 여자 목사님한테 우리 나간다고 말했나봐요. 그래서 그 전날 밤에 원장목사가 와서 “야, 니가 여기 나가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냐. 여기보다 더 좋은 데가 있을 것 같아? 너 여기 나가면 큰일나. 요즘 막 장애인들 팔아먹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니가 여기 나가면 잘될 것 같아?” 나한테 폭언이란 폭언, 협박이란 협박은 다 했어요. 근데 나도 내가 내일 당장 나갈 수 있으니까 ‘그래 짖어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어요. 그리고 다음날 다행히 정말 왔어요. 그 때 김정하활동가는 안 오고, 우리 여수센터 최희정국장님이랑 달느 여자분 한 분이랑 왔었어요. 오자마자 “많이 기다렸죠?” 그러는데 “네, 엄청 기다렸어요.” 그날 그 지옥 같은 곳을 탈출했어요.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해준 저희 센터 소장님, 제일 고마워요.

아버지와 함께 순천 갈대밭에 놀러간 김순애 씨.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아버지와 함께 순천 갈대밭에 놀러간 김순애 씨.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얼마든지 지역사회에서 같이 살 수 있다는 것

탈시설을 원하시는 분들한테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집일 것 같아요. 나오려는 분들은 당장 내가 나가서 어디서 살지 그 걱정을 먼저 할 거 같아요. 저도 나오기 전에 체험홈이라는 걸 아예 몰랐어요. 그래가지고 ‘아 내일 당장 온다는데 그럼 나 어디에 살지? 나 집 없는데 어떡하지?’ 그런 불안감이 막 밀려오더라고요. 나 또 그럼 이런 시설 비슷한 데로 가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 혼자 막 했죠. 전 처음에 체험홈도 시설이랑 똑같은 줄 알았어요. 근데 막상 가서 보니까 아니에요. 그냥 일반 가정집 같은 분위기여서 너무 좋았어요. 그 다음엔 돈이 필요하고. 그리고 얼마든지 여기 나와서 지역사회에서 같이 살 수 있다는 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 인식이 달라져야 돼요. 제가 탈시설을 딱 하면서 제일 먼저 느끼는 게 눈치예요. 시설에서 살면 눈치봐야 되거든요. 그니까 나와서는 제일 먼저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될 거에요.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 그런거... 그런게 많이 힘들어서 도로 들어가는 분들도 몇 명있다고 제가 들었거든요. 눈빛이.. 같이 살 수 있는데 왜 날 저렇게 보지? 왜 말을 저렇게 하지? 그렇게 느껴졌어요.

시설에서 사는 거랑 밖에서 사는 거랑은 확 차이가 나요. 시설에 있었을 때는 돈이라는 걸 아예 못 만져봤었으니까요. 체험호에 가니까 돈이라는 걸 만질 수가 있네? 어? 내가 이거 받아도 되는 건가? 이거 내 건가? 원래 이거 나한테 오는 건가 근데 왜 시설에 있었을 때는 나한테 안 왔지? 이거 있었으면 나 핸드폰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나와서 좋아요. 편해요. 자유가 있어요. 나는 나오고 나서 생각하는 거, 사람 대하는 거, 말하는 거 다 많이 달라졌어요. 제가 원래는 완전 소심하고 남 앞에서는 말도 못하고 사람 눈도 똑바로 못 쳐다봤어요. 원래도 그랬는데 시설 들어가서 그게 더 심해져버린 거예요. 더 막 사람 눈을 똑바로 못 쳐다봤어요. 지금도 남아있긴 한데 내가 성격을 바꿔야지, 바꿔야지, 마인드 컨트롤 하면서 제가 노력을 많이 했어요. 내가 많이 변한 걸 느낄 때 너무 좋아요.

시설이 왜 있는지 모르겠어요.

탈시설하시는 분들이 어쨌뜬 시설 밖으로 나오는 거잖아요. 무서울 거예요. 두려울 거예요. 저 역시도 두려움이 컸으니까. 그분들이 나오면 많은 게 낯설고, 낯선 사람이 뭘 물어봐도 말을 안 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 하고 많이 친해져야 말을 많이 할 거 같아요. 나는 이런 걸 원하고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나와서 유대관계를 만들어주면 그러면 많이 탈시설 하지 않을까.

저는 시설들이 많이 없어졌으면 좋겠거든요. 저는 시설들이 왜 있는지를 모르겠으니까. 제가 있던 시설이 나빠서 그랬는지 다른 시설도 그렇게 느껴져서 다 같이 나와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시설에 있으면 시야가 좁아지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시설이 이 세상의 다 인것처럼 느껴지니까. 시설이 아니라 더 큰 데를 보고 나왔으면 좋겠어요. 많은 분들이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할 수만 있다면 시설 가서 말 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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