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정미 소장

 

저는 부산의 해운대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김정미 소장입니다. 저는 어릴 때 우량아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만 해도 키가 150cm가 넘었을 정도로 키도 컸고 덩치도 좋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갈증이 많이 생겨 물을 많이 마시게 됐고 화장실도 자주 가게 됐습니다. 그러는 동안 일주일 사이에 10kg 정도가 빠졌습니다. 어머니가 보시기에도 제가 좀 이상한 것 같아 동네의 내과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제가 들은 병명은 소아 당뇨였습니다. 소아 당뇨라는 병은 앞으로 계속 인슐린 주사를 맞으며 혈당을 관리해야 하는 병입니다.

아직 12살밖에 되지 않다 보니 병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는 워낙 식성도 좋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친구들과 군것질도 많이 하다 보니 별다른 생각 없이 먹게 됐습니다. 어머니께서 소아 당뇨 때문에 먹지 못하게 한 음식이 많았는데 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다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몸은 점점 더 안 좋아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워낙 식이 조절이 잘 안 됐고 어머니는 아무 음식이나 먹지 못하게 하시려고 음식을 몰래 감추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자꾸 반항심이 생겼고 오히려 어머니께 반항하는 마음으로 콜라 같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어떤 때는 콜라 1.5L를 사서 토할 때 까지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몰래 마시고 남은 콜라병을 모아 제 책상 뒤에 숨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숨겨 놓은 콜라병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어머니께서 발견하시고 치우신 겁니다. 그때 제가 참 잘못했구나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때 남들이 제 병에 대해 아는 게 싫었습니다. 평생 인슐린 주사를 맞으며 살아야 하는 당뇨라는 병, 그 자체가 부끄러웠던 겁니다. 저는 식사를 할 때마다 매번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남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싫었던 저는 화장실에 가서 몰래 주사를 맞기도 하고 제 병이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게 싫어 대학교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먹으면 안 되는 것들을 계속 먹었습니다. 그 결과 혈당도 많이 오르고 몸도 나빠졌습니다. 대학교 3학년이 됐을 땐 햇빛이 있는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눈이 부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이미 제 눈은 많이 상한 상태였습니다만, 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현상에 대해 그냥 눈이 부시다고만 생각했지 눈이 아예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불규칙한 생활을 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방탕한 생활은 계속됐습니다. 결국, 저는 25세라는 나이에 실명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월남에 참전하셨습니다. 그로 때문에 병을 갖게 돼 실질적으로 일하시는 게 많이 힘드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가정 경제를 꾸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일하시는 바람에 제가 아무리 중한 병에 걸렸다고 해도 관리해 줄 여력이 안 되셨습니다. 식이 조절이나 운동은 당뇨환자에게 있어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렸고 저를 관리해줄 사람은 부족했습니다.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하셔서 고엽제라는 병을 얻으셨습니다. 저 또한 아버지가 가진 병과 증상이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아마 제 소아 당뇨도 아버지의 고엽제 때문은 아닐까 추측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병에 대해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월남에 가셨을 때 거기 계신 분들과 고엽제라는 약을 모기약처럼 몸에 바르셨다고 합니다. 돌아오신 후 아버지께서는 그 일 때문에 많이 아프셨습니다. 하지만 양산이라는 곳에 월남참전전우회 일을 맡아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월남에 참전한 전우들이 고엽제 판정을 받는 일에 힘쓰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계속해서 그곳의 일을 하시다 직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고 암이 간까지 전이돼 200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영천의 호국원에 안장돼 계십니다.

장애인이 되고 6개월 정도는 우울증 때문에 집안에만 갇혀 지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내가 문득 무엇인가가 저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대신해 저희를 키우시며 힘들게 살아오셨습니다. 분식 가게도 하셨고 건강보조식품 판매도 하셨고 보험 일도 하셨습니다. 지금도 행여나 제가 다칠까 꽁무니를 쫓아다니십니다.

제가 시각장애인 되고 나서 얼마지 않았을 때 우연히 동료 시각장애인을 알게 됐습니다. 그분은 시각장애도 있고 청각장애도 있는 시청각장애인이셨습니다. 청각은 보청기를 끼고 겨우 들을 정도였고 눈은 아예 안 보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과 저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전화통화를 통해 자주 만났습니다. 전화통화로 매번 저한테 격려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제가 우울한 날은 그분이 전화로 노래를 불러주셨습니다.

저에게 그 노래는 최고의 노래였습니다. 사실 노래라기보다는 기타반주에 맞춰 지르는 소리에 가까웠지만 저는 정말 감동 받아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눈만 안 보이지만 그분은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는데 제게 이렇게 큰 힘이 돼 주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지관에서 재활교육을 마친 시각장애인은 주로 안마를 배우게 됩니다. 저는 혼자서 다니지 못하니까 안마 배우기를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 동료 시각장애인분이 계셨는데 그분도 한쪽 눈만 겨우 보여 지팡이 짚고 겨우 다니셨습니다. 그분이 2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저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안마를 배울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지금은 그분을 아빠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냅니다. 그렇게 제가 주변에 인복이 많아 항상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도와주시는 분들이 항상 곁에 계십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서 힘을 받았듯 저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마를 시작했고 안마를 해서 번 돈과 같은 시각장애인분들, 주변 지인 분의 도움으로 자립생활센터를 운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전국의 자립생활센터 소장님 대부분이 자신의 의지로 어렵게 활동하십니다. 특히 중증장애인은 사회에서 소외 받고 차별받으며 집안에만 갇혀있게 돼 사회로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이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힘을 강화해 스스로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것, 중증장애인도 사회 속에서 보편적인 삶,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센터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저보다 더 심한 장애, 저보다 더 중한 질병으로 힘들어하시고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장애나 질병 때문에 무능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본인의 잠재된 능력에 대해 믿음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믿음으로 여러분이 꿈꾸는 바를 조금씩 이뤄갔으면 좋겠습니다. 보통 꿈을 가진다고 하면 아주 거대한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큰 꿈만 생각하다 보면 꿈을 이루지 못했을 때 더 허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꿈을 아주 작게 꿉니다. 작은 목표를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또 하나의 꿈이 이뤄지면 또 하나의 목표를 세우는 겁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꿈을 이룰 때마다 성취감도 느끼고 그 성취감이 자신감으로 변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스스로 잠재된 능력을 믿으시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본인의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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