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김종배 재활보조기술연구과장 ⓒ2009 welfarenews
▲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김종배 재활보조기술연구과장 ⓒ2009 welfarenews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그는 없었다.

“일찍 오셨네요? 욕창치료 좀 받고 오느라고요”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김종배 재활보조기술연구과장(49)의 첫마디였다. 지난해 11월, 재활연구소가 문을 열면서 김종배 과장도 이곳으로 왔다. 일반적으로 휠체어에 앉아만 있어도 욕창이 생기는데 연구소개설과 동시에 할 일이 많아지고 신경쓸 일도 많다보니 욕창이 생겼다고 한다.

최고의 엘리트, 또다른 삶을 살다

연세대 졸업, KAIST 석사, 미국 University of Pittsburgh 박사. 소위 말하는 최고의 학력, 브레인이다.그런 그도 사고 앞에서는 한낮 힘없는 인간일 뿐이었다.

KAIST 석사 재학 중 사고로 경추 5번을 다쳐 하반신마비가 됐다. 팔도 거의 쓰지를 못한다. 팔꿈치를 굽힐 수만 있을 뿐 펴는 것은 불가하고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다.

“처음에는 다 포기하고 싶었죠. 죽는게 낫겠다 싶더라구요. 실제로 당시 상황은 학업을 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어요.”

교수님들도 학업을 권하지 못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휠체어를 비롯한 모든 장애인을 위한 시설들이 보급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없던 신앙도 가져보았다. 살겠다는 생각을 가져서인지 그때부터는 장애가 큰 걸림돌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사고 후 16년이 되던 해, 40이 넘은 나이에 미국으로 떠났다. 장애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겠다며. 미국은 장애인이 생활하기에 어려울 것이 없었다.

모든 환경과 시설이 장애인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학업에 관련한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시험시간도 장애인들에게는 타이핑이 느린 것을 감안하여 배려가 있다. 시험 보는 교실도 장애인 보조기구가 설치된 교실에서 가능하다.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보다 나은 국민들의 삶을 만드는 일에 만족 200%

공직을 선택한 계기도 잘 배워서 한국에도 그것을 보급하고 싶어서였다. 현재 그가 하는 업무는 장애인들을 위한 다양한 보조 기술ㆍ시설을 성립하고 임상의들과 실질적인 치료에 대해 연구하며 재활정책 및 서비스표준 집행성 파악 등을 하고 있다.

그는 공직자로서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것에 상당히 만족한다. 다만, 아직 중증장애인 의무 고용률을 다 채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인구의 10%가 장애인이라고 하는데, 정부가 사회적 분위기 선도하고 기술적 인력에 대한 현실화도 신경써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공직은 장애인분들이 일하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별도 없고 모두가 평등하죠. 보다 많은 장애인 분들이 공직에 입문하시게 된다면 좋겠어요.”

힘들 때마다 레마라크의 소설 ‘개선문’의 주인공이 라빅이 마지막에 망명자들을 실은 트럭에 실려가며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라고 하는 대사를 떠올린다고 한다. 사고나기 얼마 전 읽었던 책이라 더욱 기억이 난다는 그는 어떤 환경이든지 사람이 사는 곳이라 생각한다.

“장애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직접재활입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해야되요. 사람은 일은 해야하는데, 내가 해야 할 일이 없다면 그것이 진짜 장애인거죠.”
 

국세청 구로세무서 소득세과 최재영씨 ⓒ2009 welfarenews
▲ 국세청 구로세무서 소득세과 최재영씨 ⓒ2009 welfarenews

국세청 구로세무서 소득세과에 근무 중인 최재영 씨(28). 그는 2007년 9급 공채에 40: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공직에 입문했다. 행복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의 과거는 지금과 달랐다.

“건방진 사람으로 오해받을 때가 많았어요. 가까이에 있는 것만 보이니까 교수님, 선배들, 친구들에게 인사를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죠. 처음에 저를 잘 모르는 분들은 오해 많이 하셨었죠."

유치원을 다닐 때 유치원 선생님이 유독 책을 가까이 보는 것을 부모님께 알려드려서 그때야 시각장애라는 것을 알았다.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으로 시신경이 다친 것인지 아직도 확실한 것은 모른다.

막내인 데다가 시각장애가 있다 보니 늘 부모님께서는 안쓰러워하셨다. 원서접수부터 시험장에 가는 것까지 늘 함께 하려 했었다. 40:1의 경쟁률은 뚫었어도 장애는 피할 수 없었다.

최재영씨가 시험을 보던 당시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 시험시간이 동일했다. 일반인과 똑같은 시간 내에 문제를 다 풀어야했었다. 다행히 얼마 전 부터는 장애인들은 시험시간이 좀 달라져서 다행이라고 느낀다.

칠판글씨가 안보이기 때문에 남들 다니는 학원은 꿈도 못 꿨다. 재영씨 뿐 아니라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보통 혼자 공부하게 되고 따라서 정보습득도 좀 뒤처지는 경우가 있다. 다행히 재영씨는 동영상 강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학교 고시원 덕도 좀 봤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교직에 계셨고, 집안 친척분들 대부분이 공직에 계신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공직이 친근히 느껴졌고 막연히 꿈꿔왔다. 한때는 특수교육 배우고 싶기도 했었는데, 대학은 경영학과로 진학을 하게 됐고 회계, 세무 과목에 흥미를 느끼며 세무공무원을 희망하게 됐다.

공무원 시험은 4번 떨어졌다. 힘들 때마다 내가 좀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텼고 다행히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차별 없는 공직사회, 자신을 발전시킬 발판

“공직은 편견이나 차별이 없어요. 장애인인 제가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거든요. 더 열심히 해야죠.” 재영씨는 5월부터 시작되는 근로 장려세제 준비작업으로 분주하다.

“공무원 공채에 장애인 일정비율선발이 있는데, 장애등급별로 선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등급별로 골고루 선발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합격으로 끝이 아니다. 본인과 비슷한 상황의 분들에 대한 배려심도 그대로이다. 여전히 본인의 공부비법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함께 근무하는 전구식 계장은 “처음에는 아무래도 염려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성실히 일하고 똑같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기우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말이 최재영씨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행정안전부 홍보담당관실 서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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