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장애인에 관련된 시설의 장이나 단체장이 성폭력을 행하는 경우가 많아요.”서울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 신희원 팀장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애인에게 성폭력을 행한 가해자는, 장애인과 관계없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애인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는 복지시설의 장이나 단체장일 경우가 많다.2006년 5월 실형 4년을 선고 받은 김포사랑의집 정씨는 시설수용자들에게 항정신병 약품을 강제로 복용시켜 8명이 사망했다. 또한 장애여성에게 성폭력을 행하였고, 그 중 한 명을 자신의 며느리로 삼았다.이 사건에 대해 장애·인권·노동·여성단체 등은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결성해 진상조사 활동을 벌였다. 대책위에 따르면 검찰에서는 피고인의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한 청년이 ‘Free Hugs’라고 적힌 손 팻말을 들고 거리에 서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선을 주고는 그냥 지나쳐 간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두 팔을 벌려 청년과 포옹을 나눈다. 그들은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더불어 사는 정’을 일깨워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위로와 감동이 됐던 UCC.Free Hugs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작된 ‘안아주세요 운동’이다. 후안 만(Juan Mann)이라는 청년이 2년 반전부터 거리에서 ‘무료로 안아드려요’란 손 팻말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포옹을 청했다. 이 모습은 그의 친구에 의해 3분 39초짜리 동영상으로 만들어져 세계적인 UCC 사이트 ‘유 튜브(www.youtube.com)’에 올랐다. 처음에는 냉소와 비난이 줄을 이
“내년이면 장차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될 텐데... 지금 설치를 중단하지 않으면 내년에는 장차법 시행에 대한 실천이라며 무작위로 불법 음성안내기제품 설치가 늘어날 거란 말입니다!”시민교통안전협회 김기복 대표의 따가운 목소리가 전화기를 울렸다.통화하는 내내 이 땅의 모든 시각장애인을 걱정하는 모습이 ‘김 대표도 시각장애인 인가봐’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시각장애인용 음성신호기와 음성유도기에 문제가 많다며 그가 말해준 사례는 과히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지난 3월 정식으로 개통된 김포공항과 인천공항간의 공항철도. 노선 역마다 최첨단의 시설로 갖추어 놓았다. 그러나 최첨단의 시설이 즐비한 그곳의 음성유도기는 전파법 상 불법제품으로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지난해 9월 음향신호기 설치 및 운영 실태
우리 신문에는 항상 “따뜻한 뉴스”라는 면으로 사람들 사이에 따뜻한 정이 오가는 소식을 전달하고 있다. 이런 따뜻한 뉴스에 들어갈 수 있는 일을 매일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를 거르지 않고 장애인ㆍ노숙인 600여명에게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는 영등포 밥사랑 열린 공동체. 생활 형편이 어려운 100여 개 가정에 도시락을 배달하는 부평글나라밥집. 98년 문래동 고가다리 밑에서 장애인들에게 무료 점심을 제공하던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그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영등포장애인사랑나눔의집 김금상 원장.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고자 장애인신문 기념식에서 사회에 온기를 불어 넣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쌀을 전달했다. 이들 외에도 사회 곳곳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설움을 달래주고자 애쓰는 분들께도 이 지면을 빌려 감
여우와 두루미가 한 마을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여우가 두루미에게 저녁 식사 초청을 했다. 잔뜩 기대를 하고 갔던 두루미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긴 부리로는 먹을 수 없는 편편하고 큰 접시에 담긴 수프가 나왔기 때문이다. “두루미님 맛있게 드세요.” 여우는 그렇게 말하고 수프를 맛있게 핥아 먹었다. 며칠 후 이번에는 두루미가 여우를 만찬에 초대했다. 음식은 주둥이가 길죽한 물병에 들어있었다. 여우는 주둥이를 내밀어 음식을 먹으려 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고도로 전체화 된 사회에서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관계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간
이제 꼭 한달이 되었다. 내 이름 석자 뒤에 ‘기자’라는 수식어를 달게 된 것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달 동안 ‘장애계’를 알기 위해 또 ‘기자’라는 이름값을 하려는 초보기자에게 좌충우돌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동료기자와 함께 보도블록과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장애인을 위한 편의성을 취재하겠다고 휠체어를 타고 시내에 나갔던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실제 장애인들을 만나 대중교통의 실태에 대한 인터뷰를 한다면 개선점을 금방 알게 될 텐데... 초짜기자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동행취재였다. 하지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동료기자가 휠체어에 앉아 서툴게 휠체어를 끄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밀어주시던 아주머니, 전철을
초등학교 시절 ‘장애인’이라는 말은 내게는 ‘외계인’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말에 섞인 편견의 탓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장애인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여온 ‘무지의 편견’이 나타난 것은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할 때였다.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해왔고, 장애에 대한 편견에 대해 목청 높여 반대해왔지만 실제로 장애인을 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숟가락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는 1급 장애인을 수발하며 느낀 것은 피로감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내 썩소(썩은 미소)는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때 느꼈던 부끄러움만큼 장애인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종이(이론)가 아닌 사람(실제)을 말이다. 그러면서 차차 내가 어린